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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서 화두와 씨름 부처되기

움막으로 토굴로 한번 들어가면 몇년이고 면벽 하루한끼 일종식 죽기 각오 정진

 

이 자리에서 깨치지 못한다면 일어서지 않으리라.’

 

겨우 몸 하나 움직일 만한 공간, 움막도 좋고 토굴이라도 좋다. 한 번 들어갔다 하면, 몇 년이고 바깥 세상을 피한다. 아예 출입을 하지 못하게 입구를 막아버리거나 못질을 해버린다. 이를 흔히 무문관수행이라고 부른다. 선종의 유일한 적자(嫡子)임을 자부하는 한국불교의 상징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참을성이 없어지고 도를 구하는 이도 드물어 불법이 쇠퇴하며, 교만과 시비가 넘치게 된다는 말법(末法)시대, 승가의 수행기풍과 위계질서도 날로 흐트러지고 있다. 그러나 매년 동·하안거에 수천여명의 스님들이 선방에서 정진하고 있는 가운데 무문관수행의 전통이 제방의 선원과 토굴에서 되살아나고 있으니, 불교 중흥의 서광이 아닐 수 없다.

 

무문관은 원래 중국 송나라 선승인 무문 혜개(無門慧開)가 지은 책(<선종무문관>이라고도 함) 이름. 깨달음의 절대경지를 ()’라고 표현하고, 이 무자(無字) 화두를 참구한 책이다.

 

조주(趙州)스님에게 한 학인이 (狗子)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하고 묻자, “없다()”고 대답했는데, 이때의 란 세상에서 말하는 유에 대한 상대적 가 아니라, 유무의 분별을 떠난 절대적 를 가리킨다는 뜻에서 책의 제목이 유래했다.

 

물론 문을 닫고 정진하는 폐문 정진(閉門精進)’법은 오랜 전통을 갖고 있다. 중국의 조주, 고봉스님 등이 죽기를 각오하고 정진했다는 사관(死關)’도 무문관 수행의 일종이었다. 한말 경허스님이 동학사에서 폐문 수행하고, 일제시대 효봉스님이 금강산 신계사 선방에서 3년간 두문불출하며 정진한 것도 무문관 수행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무문관이 하나의 보통명사로 자리잡게 된 것은 1964년 도봉산 천축사에서 정영스님이 무문관이라는 참선수행도량을 세우면서부터다.

 

부처님의 6년 설산 고행을 본받아 65년부터 79년까지 매회 6년간 현대의 고승들이 밖에서 문을 자물쇠로 걸고 면벽 수행했던 도봉산 천축사 무문관(無門關). 용맹정진의 상징과도 같았던 천축사 무문관은 79년 원공스님(천축사 주석)을 끝으로 문을 닫았지만.

 

 

1964년 천축사 주지 정영스님은 선객들이 참선도량을 만들어 달라는 요청을 듣고 무문관의 필요성을 절감, 처음으로 천축사에 공식적인 무문관을 개설했다.

 

부처님의 6년 고행을 본받아 6년 결제에 들어갔는데, 2회차를 마친 후 79년까지 100여명의 수좌들이 방부를 들였지만 기한을 제대로 채운 스님은 그리 많지 않다. 너무나 규칙이 엄했기 때문에, 보문 관응 구암 제선 현구 지효 경산 도천 관묵 천장 도영 석영 무불 원공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만이 이름을 남겼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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